제가 제일 좋아하는 글, Not Boring의 Optimism을 번역해보았습니다.
낙관주의 Optimism
Not Boring의 사명은 세상을 더 낙관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글로 적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아주 최근까지는 나 스스로도 이 생각을 이렇게 명확하게 정리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것은 내가 써온 많은 글의 밑바탕에 꾸준히 흐르고 있었다. Schumpeter’s Gale, Compounding Crazy, Existential Optimism, The Best is Yet to Come, The Best is Still Yet to Come, The Invisible Swarm, The Laboratory for Complex Problems, Ownership and the American Dream, Newton’s Alchemy 등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말이다. 특정 기업을 다룬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떤 일이 잘되지 않을 온갖 이유를 분석하는 것보다 “이 일이 잘 풀린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다. 원래 내가 그렇게 타고난 모양이다.
하지만 ‘타고났다’는 표현은 잘못됐다. 그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낙관적으로, 어떤 사람은 비관적으로 타고났고, 두 태도는 똑같이 타당하며, 그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두 태도가 똑같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보다 더 유용하다. 그런데 비관주의는 그래야 할 이유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
이번 주말, 줄리언 와이저가 트위터에 발레리오라는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닉 케이브의 답변을 올렸다. “지난 몇 년을 겪고 나니 마음이 텅 빈 것 같고, 어느 때보다 냉소적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고, 이런 감정을 어린 아들에게까지 물려줄까 두렵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우리’, 그러니까 인간을 믿나요?”
케이브의 답변은 훌륭하다. 그는 냉소주의가 지닌 악과 희망을 품는 태도의 미덕을 이야기한다.

냉소주의에 대하여: “냉소주의는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거의 없지만, 전염성은 대단히 강하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적이다. 내가 보기에 냉소주의는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손쉬운 형태의 악이다.”
희망에 대하여: “희망을 품는 것 역시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다. 그것은 맞서 싸우는 태도다…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존재들에게 가치가 있으며, 지켜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태도다. 이 세상은 믿어볼 만한 곳이라고 말하는 태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발레리오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일요일, 에즈라 클라인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 실린 Your Kids Are Not Doomed라는 글에서 자신이 그 어떤 질문보다 자주 받아온, 발레리오의 것과 비슷한 질문을 소개했다. 아이들이 기후위기를 겪으며 살아야 한다면, 그래도 아이를 낳아야 할까?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클라인은 아이들이 결국 괜찮을 것인 이유를 직접 설명하는 동시에, 간접적으로는 낙관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를 펼친다.
더 나아가기 전에 여기서 내가 말하는 낙관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해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낙관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것은 아마 맹목적 낙관주의일 것이다. “나쁜 결과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낙관주의가 아니다. 맹목적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만큼이나 쓸모없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낙관주의’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는 The Beginning of Infinity에서 낙관주의의 원리(The Principle of Optimism)를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악은 지식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도이치에 따르면 이 원리에서는 낙관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함의가 따라 나온다.
낙관주의는 “성공을 예언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패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실패했다면 필요한 지식을 제때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낙관주의는 미래를 대하는 하나의 태도다. 거의 모든 실패도, 거의 모든 성공도 아직 오지 않았다.
낙관주의는 물리적 세계가 설명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어떤 것이 물리 법칙상 허용된다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그 방법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장기적으로 극복 불가능한 악은 없다. 치료법이 존재할 수 없는 질병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몸은 물리적 존재이고 물리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이것을 ‘현실적 낙관주의’, ‘실용적 낙관주의’, ‘현실적이고 회의적인 낙관주의’ 등 뭐라고 불러도 좋다. 너무 순진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머릿속에서 원하는 이름을 붙여도 된다. 하지만 낙관주의의 실제 정의에 이미 그런 의미가 들어 있으니, 나는 그냥 낙관주의라고 부르겠다.
클라인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종류의 낙관주의다. 그는 심지어 비슷한 표현을 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주한 것은 물리학(physics)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politics)의 문제다”라고 쓴다. 물리의 문제에는 해답이 있다. 정치의 문제는 단기적으로 훨씬 까다롭지만, 역사의 긴 흐름은 진보를 향한다. 클라인 역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장밋빛인 것은 아니며, 인간이 진보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훨씬 덜 장밋빛이 될 것이라고 인정한다.
이것은 맹목적 낙관주의도 아니고 비관주의도 아니다. 앞으로도 일은 반드시 잘못될 것이지만, 새롭게 나타나는 모든 도전이 또 다른 진보의 기회가 된다는 지극히 낙관적인 믿음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낙관주의다. 그리고 나는 한발 더 나아가고 싶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 하나는 세상을 더 낙관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낙관주의는 진보의 속도를 결정하는 ‘메타’이며, 진보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길고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한 삶으로 이어진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트윗보다 다음 트윗을 더 많이 인용했다.
하지만 돈보다 더 큰 이야기다. 낙관주의자들은 세상을 앞으로 움직인다. 기업가정신에는 본질적으로 깊이 낙관적인 무언가가 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원하는 시장까지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 역시 낙관적이다. 우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실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지식을 이용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모든 것을 덮어놓고 믿으며 어떻게든 다 좋아질 것이라고 희망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반대다. 도이치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추측과 비판이다.”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비관주의, 즉 “사물의 가장 나쁜 면을 보거나 최악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성향,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자신감의 부족”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적극적으로 해롭다. 비관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움에 아이 낳기를 포기한다면 좋지 않다. 자신이 사는 환경을 개선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든다면 좋지 않다. 창업가가 회사를 시작하지 못하게 하거나, 회사를 시작하고도 야망의 크기를 안전한 수준으로 낮추게 만든다면 좋지 않다.
비관주의는 똑똑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시에 낙관주의는 실제로 똑똑한 태도인데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걸 바꿔보자.
오늘 나는 세 부분으로 나눠 낙관주의를 변호하려 한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비관적이다.
낙관주의는 현실을 만든다.
낙관주의의 하방은 제한적이지만, 상방에는 한계가 없다.
그런 다음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낙관주의를 널리 퍼뜨리고 실제로 실천하기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여러분의 생각도 들어보려 한다. 가보자.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비관적이다
2021년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8%가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고, 이에 따라 미국은 조사 대상국 가운데 여섯 번째로 비관적인 나라가 됐다. 이런 비관론은 안타까운 일이다. 스티븐 핑커가 Enlightenment Now에서 지적했듯, 전 세계적으로 보나 미국만 놓고 보나 그것은 근거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왼쪽 그래프는 2011년 국제달러 기준 세계총생산(Gross World Product)을 보여준다. 전 세계와 시대를 가로질러 사실상 표준화한 수치이고, 핑커에 따르면 보수적으로 잡은 추정치다. 기원전 1년부터 대략 18세기까지 거의 0에 붙어 있던 세계총생산은 이후 사실상 수직으로 치솟아 2015년 약 110조 달러까지 성장했다. 오른쪽 그래프는 1600년 이후 국가별 1인당 GDP의 증가를 보여주는데,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선 역시 거의 수직으로 올라간다.
다음 세대가 현 세대보다 못살 정도로 이런 역사적 흐름이 역전된다면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프에서 가장 최근에 나타나는 하락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로, 미국의 1인당 GDP는 2007년 이후 하락했다가 불과 6년 뒤인 2013년 새로운 최고치까지 회복했다.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끔찍하다고 생각하는지와, 불과 얼마 전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세상이 실제로 얼마나 좋아졌는지 사이의 이 간극을 다루는 것이 Enlightenment Now의 핵심 주제다. 핑커는 부뿐 아니라 생명, 건강, 불평등, 환경, 평화, 안전, 지식, 삶의 질, 행복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류가 이룬 진보를 다룬다. 각각의 영역에서 데이터는—적어도 핑커가 책에서 사용하는 데이터에 따르면—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세상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을 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좋아졌음을 보여준다.
(Enlightenment Now를 빠르게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요약을 찾는다면 제이슨 크로퍼드의 글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2017년 게이츠재단 행사에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말했듯이,
“역사상 어느 시점에 태어날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자신이 남자로 태어날지 여자로 태어날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될지 미리 알 수 없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로 지금을 선택할 겁니다.”
오바마가 짧게 말하고, 핑커가 길게 설명하고, Our World in Data가 그래프로 보여주는 이런 사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관주의가 현대사회의 기본적인 태도처럼 느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정반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트위터를 조금만 보거나 뉴스를 조금만 시청해도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범죄는 늘고 있고, 전쟁은 벌어지고 있고, 경제는 망해가고 있으며, 인간은 지구를 죽일 것이고 그러면 지구가 다시 우리를 죽일 것만 같다. 왜 그럴까?
핑커는 그 이유 중 하나로 뉴스 사이클의 구조를 꼽는다. 뉴스는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좋은 변화보다 하루하루 벌어지는 나쁜 일에 집중한다. 그는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말을 인용한다. “신문이 50년에 한 번 발행된다면 반세기 동안의 연예인 가십이나 정치 스캔들을 보도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평균수명의 증가 같은 중대한 세계적 변화를 보도할 것이다.” 하지만 뉴스는 매일 나온다. 그래서 뉴스가 그리는 세상의 모습은 암울하다.
예를 들어 Wired를 보자. 나는 실제로 이 글에 넣을 낙관적인 헤드라인을 찾으려고 그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다. Wired는 케빈 켈리가 창간한 매체다. 켈리는 말 그대로 2021년에 The Case for Optimism이라는 글까지 썼다. 그런데도 내가 주말에 Wired 홈페이지를 확인했을 때 인기 기사들은 이랬다.

인기 기사 네 개 가운데 세 개는 인종차별적인 스타워즈 팬들, ‘대규모 재감염(Great Reinfection)’, 그리고 저자가 ‘대붕괴(Great Snapping)’를 예견하는 ‘한계점(Breaking Point)’에 관한 기사였다.
이런 비관적인 기사들 사이에 네 번째 기사가 하나 섞여 있었다. 특정 소행성의 궤적을 추적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아내고,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기 전에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찍 경고해주는 최초의 소행성 탐지 시스템에 관한 기사였다.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협하는 주요 위험 가운데 하나를 줄이는 기술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사이트를 잠깐 훑어본 사람이 받아갈 인상은 아마 이럴 것이다. 사람들은 형편없고, 코로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 모두 곧 한계에 다다를 것이라는 느낌. Wired가 직접 쓰면서 동시에 그런 분위기에 기여하고 있듯, “비극들이 한데 모이고, 공기에는 종말의 색채가 감돈다.”
Wired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정말 긍정적인 헤드라인을 찾으려고 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하나도 찾지 못했다. The New York Times, BBC, The Washington Post, Al Jazeera, 아니면 여러분이 즐겨 보는 트위터 피드의 첫 화면을 확인해보라. 더 많은 비관주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토요일의 The New York Times 홈페이지는 이랬다.

덤으로, 그 전주 The Times가 뉴스레터에 실은 제목도 하나 보자.
정치인들과 제도로서의 정치 역시 공포와 분열, 비관주의를 퍼뜨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시스템 전체가 도전자들에게 현직자가 집권한 동안 상황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강조하도록 유인을 제공한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각 당이 상대 당이 제안하는 진전을 가로막고, 실제로 진전을 이루기보다는 그렇게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공격 소재로 삼는 데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는 미국인들을 서로 적대하게 만들고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거짓으로 약속했다는 점에서 큰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특정 정당의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 역시 공동의 목표를 중심으로 나라를 다시 하나로 묶을 기회를 너무나 형편없이 날려버렸다는 점에서 나는 크게 실망했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일론 머스크에게 NASA의 지원을 받는 SpaceX의 달 탐사에 빈정대며 행운을 빈다고 한 것은, 최근 진보주의자들이 ‘진보’ 자체와 그 진보를 만들고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정치인들은 언론인보다도 더 실망스럽다. 이들은 우리가 나라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라고 뽑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상대방 때문에 나라가 얼마나 엉망이 됐는지를 말한다. ‘Make America Great Again’ 대신 내가 지지하고 싶은 선거 구호는 이런 것이다. Keep Making America Greater.
하지만 그런 말로는 표를 얻지 못한다.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더 넓은 의미의 냉소주의 계층 덕분에 지금은 비관주의가 승리하고 있는 듯하다.
진보를 뒷받침하는 온갖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깎아내리고 싶은 유혹을 참지 못한다. Huge If True의 클레오 아브람은 이를 멋지게 표현했다.
이것은 현대에만 나타난 현상도 아니다. 2016년 모건 하우절은 Why does pessimism sound so smart?라는 글을 썼다. 그는 비관주의자들이 언제나 낙관주의자들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고 설명하면서, 150년 전 존 스튜어트 밀이 남긴 말을 소개한다. “다른 사람들이 절망할 때 희망을 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희망을 품을 때 절망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현자로 존경받는다는 사실을 나는 관찰해왔다.”
하우절은 비관주의가 그토록 많은 주목을 받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낙관주의는 위험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기본적으로 비관주의가 더 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낙관주의자를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한다.)
비관주의는 모든 일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지닌 개인적 부족함을 합리화하기 쉽다. (불행에는 동료가 필요한 법이다.)
비관주의는 행동을 요구하지만, 낙관주의는 지금 하던 대로 계속하라는 의미처럼 보인다. (“팔아! 팔아! 팔아!”가 “보유해”보다 더 적극적으로 들린다.)
낙관주의는 무언가를 팔려는 말처럼 들리는 반면, 비관주의는 누군가 나를 도와주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낙관적인 전망이 맞는 경우가 많고, 비관주의자들 역시 무언가를 팔고 있다.)
비관주의자들은 시장이 얼마나 꾸준히 적응하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현재의 추세를 미래까지 그대로 연장한다. (이는 인간의 적응 능력을 놓친다.)
내가 유일하게 동의하지 않는 것은 3번이다. 비관주의는 행동을 요구하고 낙관주의는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만든다는 주장 말이다.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비관주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게 만드는 반면, 낙관주의는 행동을 요구한다.
나는 낙관주의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을 망설였다. 너무나 당연히 옳은 입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가 낙관주의에 반대하겠는가? 하지만 이 부분에서 봤듯, 자신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음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싸움에서 낙관주의자들은 불리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재의 상태 자체가 적극적으로, 그리고 엄청나게 해롭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낙관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낙관주의가 실제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낙관주의는 현실을 만든다
비관주의나 낙관주의가 우리의 기분에만 영향을 준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충분히 나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비관주의가 밀어붙이는 방향은 그보다 더 해롭다. 낙관주의는 현실을 만들기 때문이다.
Scale CEO 알렉스 왕은 같은 제목의 메모리얼데이 주말 글에서 엔지니어가 프로젝트에 설정하는 범위가 프로젝트를 얼마나 빨리 끝낼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범위를 따로 설정하지 않은 긴급 프로젝트는 일반적인 가우스 분포, 즉 정규분포나 종 모양 곡선을 따른다. 그런데 중간 정도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평균 프로젝트 기간이 늘어난다. 원래라면 빠르게 끝날 수도 있었던 결과들이 대부분 중간 지점 직전에 몰리기 때문이다. 비관적인 범위, 즉 프로젝트가 실제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한 뒤 그 예상에 맞춰 목표를 설정하면 프로젝트의 완료 시점도 뒤로 밀린다.
반대로 낙관적인 범위를 설정하면 프로젝트가 더 빠르게 움직인다. 알렉스의 표현을 빌리면,
낙관주의의 결핍은 어떤 제품이든, 팀이든, 사명이든 서서히 죽인다. 실행 속도는 느려지다가 결국 멈추고, 가장 사소한 일조차 끝내는 데 몇 주가 걸리게 된다. 우리의 낙관주의와 결의는 우리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작은 개별 과업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그것이 쌓여 평생 우리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차원에서도 그렇다.
낙관주의가 현실을 만들고 사람들이 더 빠르게 진보하도록 돕는다면, 그리고 진보가 건강, 수명, 행복, 평등을 비롯해 우리에게 중요한 수많은 지표를 향상시켜왔다면, 더 많은 낙관주의는 좋은 것이다. 실제로 임마누엘 칸트는 1795년 Perpetual Peace: A Philosophical Sketch에서 “낙관주의는 도덕적 의무다”라고 썼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칸트의 생각을 확장해 이렇게 말했다.
낙관주의는 의무다. 미래는 열려 있다.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우연히 맞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가 하는 행동을 통해 미래를 결정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미래가 성공적인 것이 되도록 만드는 데 우리 모두는 똑같이 책임이 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철학자들의 지적 권위를 빌리지 않더라도, 낙관주의가 진보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이룬 모든 위대한 성취는 낙관주의에서 출발했다. 장애물이 있더라도 지식을 늘려나간다면 인간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JFK가 “우리가 달에 가기로 한 것은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낙관적인 선언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아직 어떻게 해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선언이다. 그 연설이 중요했던 이유는 단순히 낙관적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낙관주의가 현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달 착륙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상황에서 1962년 9월 12일의 그 낙관주의라는 충격이 없었다면, 우리는 1969년 7월 20일 달에 착륙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왕의 분포 그래프와 마찬가지로, JFK가 제시한 낙관적인 마감 시한은 진보를 미래에서 현재로 끌어당겼다.
반사실적 가정을 따져보는 것은 어렵고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JFK와 같은 연설이 더 많이 나오지 못했고 그 자리를 노골적인 비관주의가 대신했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 역시 비관주의자들이 실제보다 더 똑똑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비관주의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반면, 낙관주의자들이 밀어붙였다가 실패한 일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실험이나 회사를 둘러싸고 비관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 그래프들을 떠올려보라.
핑커가 책 전반에 걸쳐 보여줬듯, 장기적으로는 결국 거대한 추세가 승리한다. 비관주의가 진보 자체를 멈추지는 못한다. 과거의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보해왔다. 하지만 비관주의는 진보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그리고 진보는 복리로 쌓이기 때문에—한 실험이 새로운 지식을 만들고, 그 지식 위에서 다음 실험이 이루어지기 때문에—비관주의가 끼치는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
다행히 그 반대도 사실이다. 도이치의 표현을 빌리면 “지식의 성장을 파괴하지 않는 혁신이 초래할 수 있는 피해는 언제나 유한하다. 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선에는 한계가 없다.”
낙관주의의 하방은 제한적이지만, 상방에는 한계가 없다
일이 잘 풀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보다 일이 잘못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편이 더 쉽다. 하지만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상방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는 만큼, 이런 본능적인 편향에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원자력을 살펴보자. 혹은 Lux Capital의 조시 울프가 최근 즐겨 부르는 표현을 빌리면 ‘elemental power’를 살펴보자.
먼저 질문 하나로 시작하자.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발생한 방사선 때문에 지금까지 사망한 사람은 몇 명일까?
아직도 감이 안 오나?
좋아, 이제 정답을 공개하겠다.
역사상 원자력발전소 사고에서 나온 방사선 때문에 사람이 사망한 사고는 단 두 번뿐이다. 체르노빌(46명)과 후쿠시마(1명)다. 합치면 47명이다. 물론 후쿠시마에서는 대피 과정에서 수백 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단 한 명의 죽음도 너무 많은 죽음이지만, 원자력을 둘러싼 비관론과 실제 사실 사이의 간극은 그 어떤 에너지원보다도 압도적으로 크다. 실제로 Our World in Data에 따르면 원자력은 사고와 대기오염으로 인해 테라와트시(TWh)당 0.07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다. 1TWh는 유럽인 약 18만 7천 명이 1년 동안 소비하는 에너지에 해당한다.
풍력, 수력, 태양광은 모두 그보다 조금 더 낮지만, 이들의 안전성을 걱정하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보기 어렵다. 석탄은 원자력보다 351배 더 위험하고, 석유는 원자력보다 263배 더 위험하다.
핑커는 이것을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탓으로 본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의 사례가 얼마나 쉽게 떠오르는지를 기준으로 그 사건이 일어날 확률을 판단한다. 핵폭탄이 터질 때의 버섯구름이나, 방사선 중독으로 피부가 끓어오르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쉽다. Construction Physics가 지적하듯 원전 건설비용의 상승 역시 원자력 쇠퇴에 한몫했다. 그리고 그 비용 상승의 상당 부분은 강화된 규제에서 비롯됐다.
후쿠시마 사고가 낳은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다른 나라들이 겁을 먹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독일은 사고가 발생한 지 두 달 만에 원자력과 결별하기로 결정했다. Washington Post가 인용한 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독일이 탈원전을 추진한 뒤 원자력발전소를 임시로 대체한 석탄발전소에서 나온 유독가스와 미세입자를 흡입하면서 매년 약 1,100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미국의 경우 원자력 발전용량은 후쿠시마 사고 이듬해인 2012년에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런 비교적 직접적인 수치만으로도 그 격차를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유럽은 최근 해외 에너지에 의존할 때 어떤 지정학적 곤경에 빠질 수 있는지를 직접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풍부하고 안정적이며 깨끗할 가능성이 있는 에너지원에 대한 비이성적인 거부감 때문에 세계가 놓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깨끗한 에너지가 풍부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1년 동안 본 영상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이전에도 공유한 Huge If True의 The Big Misconception About Clean Energy다.
Huge If True는 스스로를 “낙관적인 테크 쇼”라고 소개하는데, 이 영상은 그런 접근법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보여준다. 영상에서 에이브럼과 맷 이글레시아스는 기후위기를 피해야 할 재앙으로 보는 대신 붙잡아야 할 기회로 바라본다. 그들의 메시지는 이렇다. 원자력, 지열, 풍력, 태양광을 포함한 청정에너지원으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는 대신 오히려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다. 이는 개발도상국에 훨씬 현실적인 접근일 뿐 아니라 모두에게 더 희망적인 미래이기도 하다.
내가 ‘상방에는 한계가 없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이브럼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앞으로 1분 동안은 그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을 그냥 들어보세요. 그리고 무엇이 잘 풀릴 수 있을지 마음껏 상상해보세요.” 이글레시아스는 이미 방법은 알고 있지만 에너지 집약적이어서 대규모로 실행하기 어려운 몇 가지 기술을 나열한다. 깨끗한 에너지가 풍부하다면 이 모든 것을 비교적 손쉽게 확장할 수 있다.
직접공기포집(Direct Air Capture)을 이용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제거한다.
수직농장을 만들어 물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모든 사람에게 현지에서 생산한 식량을 공급하고, 더 높은 효율로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한다.
바닷물을 담수화해 사실상 무제한에 가까운 식수를 생산한다.
이것들은 고작 세 가지 사례일 뿐인데, 각각만으로도 인간의 기대수명을 크게 늘릴 수 있다. 특히 기후위기를 피함으로써 수십억 명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사실상 공짜에 가까운 풍부한 청정에너지가 전기차부터 초음속 비행까지 온갖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보라.
더 크게 생각해보자. 핑커는 이렇게 쓴다. “지식이 이끄는 에너지는 우리가 엔트로피를 막아내는 비약이며, 에너지를 포획하는 기술의 진보는 곧 인류 운명의 진보다.” 더 많은 에너지는 더 많은 비약을 뜻하고, 이는 엔트로피와 벌이는 끝없는 싸움에서 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비관적인 시나리오에서는 과거의 재난이 그대로 반복된다고 가정하고—소형 모듈 원자로 같은 더 안전하고 저렴한 현대식 원자력 기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무시한 채—47명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본다. 반면 낙관적인 시나리오에서는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수천만 명을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게 하며, 모든 인간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다.
풍부한 청정에너지는 다른 모든 기술을 움직이는 기반이기 때문에 잠재적 영향력이 가장 큰 기술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똑같이 낙관적인 관점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분야는 그 밖에도 많다.
교육은 파급효과를 증폭시키는 힘이다. 모든 학생을 분포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려 하기보다, 개인화되고 동기를 부여하는 교육을 누구나 풍부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지식의 창출은 진보의 뿌리에 있다. 그래서 나는 교육 혁신을 시도하는 Primer, Agora, Synthesis 같은 회사들에 큰 기대를 갖고 있다.
우주는 탐험하고 거주하고 상업화할 수 있는 무한히 넓은 개척지다. 인류가 여러 행성에 정착하고, 궁극적으로 여러 태양계에 걸쳐 살아가게 된다면 장기적인 생존 가능성은 높아진다. 탐험 그 자체가 주는 영감은 말할 것도 없다. SpaceX, Hadrian, Varda를 비롯한 수많은 회사가 내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다.
헬스케어는 말할 필요도 없이 건강과 삶의 질에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GDP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 의료 시스템과 사람들이 실제로 받는 치료가 개선되면 건강하게 사는 기간이 늘어나는 동시에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돈도 확보된다. 나는 NexHealth, Fount, ScienceIO, Oscar, Cityblock에 관해 글을 썼고, 이 분야의 다른 많은 회사에도 투자했다.
이 모든 분야와 그 밖의 수많은 분야에서 낙관주의가 만들어낼 상방은 사실상 무한하다. 그렇다고 각각의 산업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변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진전을 하나씩 실험하며 쌓아 올리고, 그것이 복리로 축적되어 결국 큰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기업가, 정책 입안자, 사업가, 연구자들을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원리 때문에 내가 web3에도 그토록 낙관적이다. 국경 간 결제 같은 직접적인 잠재적 효용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web3는 다른 수많은 혁신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거버넌스와 경제 모델을 시험하는 페트리 접시이기도 하다. 나는 이 아이디어에 대해 여기에서 쓴 적이 있다. Vibe Bio와 Toucan 같은 회사는 각각 신약 개발과 탄소배출권의 인센티브 구조, 자금 조달 방식, 투명성을 새롭게 설계하려 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web3의 모든 것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트위터의 누군가는 95% 이상이 실패할 것이라고 추산했는데, 나도 동의한다. 시장에 사기와 악의적인 참여자가 많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이들은 직접적인 피해보다 더 큰 해를 끼치기도 한다. 비관주의자와 냉소주의자들에게 정당한 공격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실험들이 지식을 늘리고, 예상하지 못한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은 강하게 믿는다.
(혹시 오해가 없도록 덧붙이자면, web3 토론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것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좋은 비판’의 범주에 넣겠다. 이 글이 비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AI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위에서 말한 것들 중 무엇이든 DALL-E 2와 GPT-3의 ‘손주 세대’ 기술과 결합해보라. 그 결과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케빈 켈리는 자신의 Case For Optimism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AI(Ubiquitous AI)’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낙관적인 힘”이라고 부른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에 대해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제시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주장은 이미 제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일론 머스크처럼 미래지향적인 사람조차 AI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많은 우려는 타당하며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우려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새로운 문제에 맞춰 진화하고, 새로운 해결책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진보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제시한 모든 것—그리고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은 낙관주의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시행착오와 추측과 비판을 통해 인간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더 낙관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행동하는 낙관주의: 풍요의 어젠다와 아메리칸 다이너미즘
낙관주의를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한 첫 단계는 비교적 부드럽다. 역사적 사실과 장기 추세에 대해 더 많이 교육하고, 낙관주의가 실제로 무엇인지 더 정확히 이해하고, 두려움 대신 진보가 가져오는 혜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오늘 나는 작은 방식이나마 바로 그것을 해보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두 가지 사례가 낙관주의를 제도 속에 녹여내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하나는 정부를 위한 더 낙관적인 계획인 풍요의 어젠다(The Abundance Agenda)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기업과 정부가 부족한 부분을 스타트업이 채울 수 있다고 보는 아메리칸 다이너미즘(American Dynamism)이다.
풍요의 어젠다
1월, 데릭 톰슨은 The Atlantic에 A Simple Plan to Solve All of America’s Problems라는 글을 썼다. 톰슨에 따르면 트위터 같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의 부상과 물리적 세계, 즉 ‘원자(atoms)’ 영역의 진보 둔화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미국에는 “불만을 쏟아내는 일(venting)은 너무 많고,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일(inventing)은 너무 적다”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불평하면서 원자력에는 반대한다. 집값 상승을 불평하면서 새로운 주택 건설은 막는다.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해온 바로 그 문제다. 목소리 큰 비관주의와 존재감 없는 낙관주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톰슨은 풍요의 어젠다(abundance agenda)를 제안한다. 필요한 것을 더 많이 만들어내기 쉽게 함으로써 국가적 희소성 문제를 해결하자는 초당파적 전환이다. 이는 에즈라 클라인이 제안한 공급측 진보주의(supply-side progressivism)와 비슷하다. 식품보조금, 사회보장제도, 보편적 의료처럼 수요 측면에 집중하는 대신, 정부의 노력을 ‘더 많은 것을 만드는 것’에 집중해 핑커가 책에서 보여준 온갖 상승곡선의 속도를 높이자는 것이다. 더 많은 의사, 더 많은 청정에너지, 더 넓은 교육 접근성, 더 많은 고숙련 이민자. 항상 존재하는 부족분을 돈으로 메우는 대신, 혁신을 통해 문제 자체에서 빠져나오자는 주장이다.
중요한 점은 톰슨 역시 풍요의 어젠다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위협을 혜택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봐야 한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이것은 거리낌 없이 유토피아적인 비전이다. 하지만 불평에서 발명으로, 지위를 둘러싼 제로섬의 소모전에서 미국의 위대함을 위한 포지티브섬의 해결책으로 움직이려면, 사소한 개선책의 목록만으로는 부족하다. 진보와 성장에 대한 변론도 필요하다. 풍요의 어젠다가 성장을 추구하는 이유는 성장 자체가 목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더 편안한 삶,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더 큰 힘, 사랑하는 일에 쓸 수 있는 더 많은 시간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적 진보만이 아니다. 낙관주의를 향한 태도의 전환도 필요하다.
아메리칸 다이너미즘
정부가 풍요를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의사의 수를 늘릴 수 있도록 법을 바꾸고, 연구개발에 자금을 지원하고, 원전 건설비용을 터무니없이 높이는 규제를 줄이고, 개발을 장려하도록 용도지역 규제를 바꾸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정부 혼자 혁신할 수는 없다. 애초에 정부가 가장 잘하는 일도 아니다. a16z의 American Dynamism 부문을 이끄는 캐서린 보일은 국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정부가 스타트업과 훨씬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보일은 최근 노아 스미스와 인터뷰를 했고, Acquired에서 벤과 데이비드와 대화하는 등 여러 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그녀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최근 미국의 정체를 되돌리고 코로나 이후 혁신을 다시 가동할 유일한 방법은 “국익을 뒷받침하는 회사를 기술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녀 역시 기술 발전이 퍼즐의 중요한 조각임을 인정하지만, “무엇보다도 역동성에는 낙관주의와 성장 및 기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보일이 내놓는 해결책은 톰슨의 것과 다르거나, 최소한 상호보완적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풍요를 만들어내는 어떤 계획이든 낙관주의를 다시 불붙이고 진보와 성장의 가치를 새롭게 인정하는 것이 핵심 요소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같다.
구체적인 해결책이 무엇이든 이제 비관주의는 물러나고 낙관주의가 번성할 때다. 스미스와의 인터뷰에서 보일은 펜을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에게 넘긴다. 월리스는 냉소적 아이러니의 효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했는데, 그의 생각은 스티븐 J. 번의 Conversations with David Foster Wallace에 이렇게 담겨 있다.
아이러니는 환상을 깨뜨리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환상 깨부수기가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되어 거의 다 끝났다… 이제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계속 조롱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던한 아이러니와 냉소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고, 세련된 감각과 문학적 영리함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바로잡을 방법에 대해 감히 이야기하려는 예술가는 거의 없다. 지쳐버린 아이러니스트들에게 감상적이고 순진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해방의 도구에서 예속의 도구로 변했다.
트위터든 여러분이 즐겨 쓰는 다른 소셜미디어든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봤다면, DFW의 관찰이 얼마나 사실인지 알 것이다. 결국 ‘비관주의자는 똑똑해 보이고 낙관주의자는 순진해 보인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낙관주의자들의 편에 있다. 문화 역시 이들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끔찍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물론 더 냉소적인 미래도 끔찍하게 들리긴 한다—훨씬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낙관주의자들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그리고 설령 옳더라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어려울 것이다. 에이브럼은 앞서 소개한 영상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것은 야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까지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대담해져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죠.”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모든 층위에서 이런 태도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나는 트위터에서 사람들에게 앞으로 10년을 가장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답변은 “내 아이들”부터 코로나 백신 개발 노력, 원격근무, DNA 시퀀싱, 핵융합까지 다양했다.
찾아보면 낙관적으로 바라볼 만한 것은 정말 많다. Not Boring에서는 앞으로도 낙관주의자들에게 투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많은 것들을 실제 현실로 만들어가는 사람들과 기업들 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어려움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일이 잘 풀렸을 때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내 낙관주의와 균형을 맞춰줄 냉소주의자는 이미 세상에 충분히 많다.
그리고 나는 더 많은 것을 하고 싶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다. 대부분의 미디어 홈페이지를 뒤덮은 종말론적 헤드라인에 작게나마 맞서기 위해, 매주 낙관적인 이야기들을 모아 소개하는 글이 있다면 읽고 싶은지 알려달라. 여러분의 아이디어도 듣고 싶다. 이 글에 관한 내 트윗 @packym에 답글을 달아 의견을 보태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