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모포기아의 후예들
신을 섭취함으로써 힘을 취하는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
체제의 전복을 바라는 사람들
스피노자는 만들어진 정복 군주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기독교를 전복시키려 한 시도였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실은 기독교를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한 종교·철학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물에 가깝다.
스피노자는 당시 비기독교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신에게 이성과 의지를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에티카』와 『신학정치론』을 통해 신으로부터 이성과 의지를 제거하려 시도했다.
더 나아가 유럽 문명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설득력을 잃었다고 진단한 니체도 기독교 체제를 전복하거나 역사로부터 제거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카를 야스퍼스는 니체의 선언이 기독교가 쌓아올린 역사 위에 기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려고 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니체가 자신을 보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동기를 통해 기독교로부터 성장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투쟁은 단순히 기독교를 버리거나 역사에서 제거하거나 그 이전 시대로 돌아가려는 의도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기독교가, 그리고 오직 기독교만이 발전시킨 힘으로 기독교를 극복하고 초월하고자 합니다
—카를 야스퍼스, 『니체와 기독교』
그럼에도 종교적 신념이 쇠퇴하는 오늘날, 스피노자와 니체는 기독교를 소멸시킨 정복 군주처럼 추앙된다. 사회는 기독교라는 체제 위에 세워졌지만, 인류의 역사는 ‘기독교 이후’로 진입했다고 평가받고, 현대 문명은 ‘과학’이라는 새로운 체제 위에 세워졌다고 믿는다. 현대 사회는 기독교 체제의 전복을 누구보다도 열망한다.
디오니소스의 오모포기아
체제를 전복함으로써 힘을 얻으려는 욕망은 Euripides의 『Bacchae』에서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다.
『Bacchae』에서는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은 염소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을 산 채로 찢는 스파라고모스(sparagmos)를 행하고, 그 날고기를 먹는 오모포기아(omophagia)를 통해 그의 힘을 섭취(entheos)한다. 신을 ‘섭취’하여 힘을 취하는 이 오모포기아적 종교 행위는 형식을 바꿔 오늘날에도 이어지며, 지금은 체제 전복의 욕망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이론’을 통해 디오니소스와 같은 신화가 가려온 폭력을 드러냈다. 위기의 순간마다 군중은 원인과 처벌 대상을 요구하고, 희생양을 지목해 처벌함으로써 위기를 봉합한다. 오늘의 사회는 기독교를 부정하고 그것을 희생양으로 삼아 체제의 전복을 노리고 있다.
이러한 체제의 전복은 사회의 중추였던 기독교뿐 아니라 ‘파괴적 혁신’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산업에서 성행되고 있다.
순환논증의 파괴적 혁신
크리스텐슨의 파괴적 혁신은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아이디어일 뿐이다. 파괴적 혁신을 옹호하는 이들은 기존 기업이 파괴적 혁신을 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라 이야기하고 파괴적 혁신이 실패한다면 제대로된 파괴적 혁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이야기한다. 이처럼 파괴적 혁신은 순환논증에 빠지기 쉽다.
공포에 기댄 파괴적 혁신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체제 전복의 추종자들은 파괴적 혁신을 요구하고, 파괴적 혁신에 실패한 체제를 희생양 삼고, 그 힘을 섭취함으로써 또 다른 체제의 파괴를 요구한다.
이처럼 체제의 전복은 역사를 파괴한다. 하지만 지속된 역사만이 이러한 체제 전복으로부터 살아남게 한다.
스퀘어의 Innovation Stack
카드 결제기 기업 스퀘어는 아마존처럼 거대한 기업이 같은 시장에 진입했음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눈에 띄는 대응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건 스퀘어가 아마존이 시장에 진입하기 전까지 문제-해결-문제-해결…이라는 Innovation Stack을 쌓아두었고, 아마존은 거대 자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Innovation Stack을 동일하게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즉, 보이지 않은 혁신 덩어리가 존재하고 이것이 곧 경쟁력이 된다.
그러나 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이들은 이 Innovation Stack을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해결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빈 땅에서 더 나은 역사를 세울 수 있다고 착각한다.
실수의 반복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사실은, 다시 새롭게 무언가를 세우면 더 잘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다시 했을 때 더 잘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1997년, Netscape는 4.0에서 5.0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코드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3년이 넘는 시간동안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Netscape 5.0은 세상에 내놓지 못했고 3년 후에야 Netscape 6.0이 출시되었을 뿐이다.
새 코드가 옛 코드보다 좋을 거라는 점은 착각에 불과하다. 새롭게 다시 구축한 코드가 더 좋은 코드라는 것은 착각이다. 옛 코드는 이미 유저가 사용하고 있고, 테스트를 거쳤으며, 수많은 버그가 발견되고 수정도 완료되었다. 즉, 문제-해결-문제-해결…이라는 역사를 이미 쌓은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더 잘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과거의 레거시를 악으로 규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기를 열망한다. 그러곤 레거시에서 겪었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떠한 대상, 산업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할지라도 그것이 밟아 온 문제—해결의 누적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테세우스의 배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판자를 하나씩 갈아 끼우면서 보존해 왔다. 이렇게 보존한 테세우스의 배는 과거의 테세우스의 배보다 더 단단하고 강하다. 그들은 테세우스의 배가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 고쳐 냈고,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부분을 도려내어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덧대어진 테세우스의 배는 정말이지 이상하고 낡아 보인다.
사회의 제도와 산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상하고 낡아 보이지만, 당시 최고이자 최선의 선택이었고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 위에서 더 나은 역사를 쓰기
체제 전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유산을 거부한다. 그들은 과거의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기존 산업이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처음부터 건설하기를 원한다.
이런 체제 전복만을 원하는 사회는 잘못되었다.
나는 사회의 힘이 역사를 단절시키고, 과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쌓아올리는 능력이 아니라, 결함에도 견딜 수 있는 역사적 체제에서 힘을 얻는다.
우리는 기존 사회를 더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사고를 집중해야 한다.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위에서 더 나은 역사를 쓰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글의 내용처럼 "기존 사회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체제를 전복하여야만 한다", "파괴적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사상은 경계해야하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이 점에서 과거로부터 유지된 현재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좋아보인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현 체제가 그 당시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였다고 할지라도, 다른 분야들에서의 발전이 유의미하게 누적되면 오늘 날의 최선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자동차가 없는 세상에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닙니다. 이 자전거를 개선해서 훨씬 좋은 자전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은 자전거를 개선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누가 의문을 품습니다. "자전거보다 빠르고 실용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는 기존의 사회적 통념에 도전합니다. 남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들이 찾아내지 못한 "숨겨진 비밀"을 찾아낸 그는 자전거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준이 될 자동차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획일화 된 교육으로 인해 점진적 개선을 통한 경쟁이 과열화 된 오늘날에는 체제를 개선하려는 마음보다 제로 투 원의 혁신적 마음이 더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기존의 체제의 개선보다 반드시 혁신이 낫다는 말이 아닙니다.
파괴적 혁신만이 정답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진실인데 남들이 동의해주지 않는 것" (=혁신)이
"남들이 동의해주는 것"의 반대 (체제 전복)이 아니기에
레거시를 교훈 삼아, 진정한 혁신을 추구하는 자세가 가장 좋지 않나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